[비즈한국] 희귀질환 가운데서도 환자 수가 특히 적은 질환은 ‘극희귀질환’으로 분류된다. 국내에서는 통상 유병인구 200명 이하이거나 질병분류코드조차 없는 질환을 뜻한다. 환자가 적다는 것은 곧 진단 경험도, 치료 데이터도, 사회적 관심도 부족하다는 뜻이다. 그 결과 병명을 찾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고, 어렵게 진단을 받아도 치료제와 제도가 따라오지 못해 환자와 가족이 고통을 온전히 떠안는 일이 반복된다. 비즈한국은 숫자 뒤에 가려진 극희귀질환 환자들의 현실과 의료 사각지대를 짚어본다.
희귀질환 환자의 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 수억 원의 건강보험 재정이 투입된다. 환자와 보호자에게는 간절히 기다린 것이지만 이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마냥 따뜻하지만은 않다. 한편에서는 ‘소수를 위해 너무 많은 세금이 낭비되는 것 아니냐’ ‘그 돈이면 수천 명의 경증 환자를 살릴 수 있다’는 서늘한 시선 아래 계산기를 두드린다. 건강보험 재정 안정성이라는 보건당국의 고충을 이해하면서도 비용 대비 효과를 기준으로 환자의 생명 가치를 저울질해야 하는 비정한 현실이 놓여 있다.
이 같은 갈등은 최근 더욱 노골적으로 표면화됐다. 보건의료단체연합, 참여연대, 한국노총, 민주노총 등 40여 개 단체가 참여하는 무상의료운동본부는 지난 24일 청와대 사랑채 분수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의 희귀질환 치료제 신속 등재 방침에 제동을 걸었다.
무상의료운동본부 측은 “신속 등재는 환자의 절박한 상황을 논리적 방패로 삼는 것으로, 환자 보호가 아니라 환자를 이용하는 것”라며 “신속 등재로 평균 수억 원짜리 희귀질환 치료제 50여 개가 급여 적용을 받으면 수조 원이 소요될 수 있기 때문에 건강보험 재정도 위협받는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병마와 싸우는 것만으로도 삶이 버거운 희귀질환 환자와 가족들은 이러한 시선에 무너질 수밖에 없다. 치료비 지원을 호소할수록 남의 세금을 축내는 도둑이 된 것 같은 자괴감에 빠지기 때문이다. 결국 이들을 두 번 울리는 것은 희귀질환이라는 ‘병마’가 아니라, 생명의 가치를 경제성으로 재단하는 우리 사회의 비정한 잣대라고 볼 수 있다.
#“수백만 원 검사 또 받으라니…” 데이터 절벽에 가로막힌 골든타임
정부는 2022년 제2차 희귀질환관리 종합계획을 발표하면서 권역별 거점센터를 확대하고 진료 협력 체계를 강화하겠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현장이 느끼는 체감 효과는 아직 크지 않다. 가장 뼈아픈 대목은 정부 차원의 통합적인 실시간 임상 치료 레지스트리(환자 데이터망)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단순한 진료 기록이나 영상 자료(MRI·CT)는 병원 간 교류 시스템으로 어느 정도 확인이 가능해졌지만 정작 신약 투여의 핵심 근거가 되는 NGS(차세대 염기서열 분석) 원시 데이터는 공유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게 현실이다.
수십 기가바이트(GB)에 달하는 대용량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주고받을 전용 인프라가 없다 보니 지방 병원에서 확진을 받고 서울 대형병원으로 전원한 환자들은 100만~200만 원의 고가 검사를 처음부터 다시 받아야 하는 일이 빈번하다. 결과가 나오기까지 소요되는 시간까지 고려하면 질환의 진행 속도가 빠른 희귀질환자들에게는 이 치료 공백이 회복 불가능한 신경과 장기 손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희귀질환 환자 A 씨는 “병원끼리 검사 자료 호환이 안돼서 새로 검사를 받아야 해 비용이 너무 많이 드는 것도 부담이다”고 토로했다.
#글로벌 제약사만 쳐다보는 환자들, 국내 제약사 지원은 어디에
국가 인프라가 작동하지 않는 틈을 그나마 메워주는 것은 역설적으로 초고가 약을 보유한 글로벌 제약사들이다.
글로벌 제약사들은 건강보험 급여가 적용되기 전이거나 심사에서 탈락해 사각지대에 놓인 환자들에게 환자 지원 프로그램(PAP)이나 동정적 사용 승인 프로그램(EAP)을 가동해 생명줄을 이어주고 있다. 한국로슈는 척수성 근위축증(SMA) 경구용 치료제 ‘에브리스디’가 급여를 받기 전, 약 80명의 국내 환자들에게 EAP를 통해 약을 무상 공급했다. 한국아스트라제네카도 신경섬유종증 치료제 ‘코셀루고’의 급여 혜택을 받지 못하는 성인 환자들의 약값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약제비 일부를 환급해주는 PAP를 운영 중이다.
반면 국내 제약사들의 환자 지원 시스템은 초라한 수준이다. 최근 희귀질환 신약 개발에 뛰어드는 곳은 늘었지만 이들은 신약 허가와 상업성에만 집중할 뿐, 제도권 밖에서 생사의 기로에 놓인 국내 환자들을 구제하기 위한 사회적 안전망 구축에는 인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결국 한국의 희귀질환 환자들은 살기 위해 국가가 아닌 글로벌 제약사의 선의에 목을 매고 있다. 희귀질환 환자 보호자 B 씨는 “제네릭 약가 인하에 인색한 국내 제약사들에 아쉬운 마음이 들 수밖에 없다”면서 “다만 최근 이엔셀이 샤르코-마리-투스병(CMT) 치료제 개발에서 진전을 보인 것처럼 국내에서 혁신적인 치료제가 계속 개발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기차 타고 왕복 800km ‘약 배달’…탁상행정이 빚은 쿨러백
희귀질환 환자들에게 병원을 방문하는 것도, 의약품을 타가는 것도 넘어야 할 거대한 산이다. 혁신 신약의 상당수는 2~8도의 엄격한 냉장 보관(콜드체인)이 필수적인 바이오의약품이다. 희귀질환 환자 보호자 C 씨는 “병원을 방문한 뒤 직접 의료용 쿨러백(아이스박스)에 약을 담아가야 한다”면서 “병원에서 해주는 것은 아이스팩 하나 더 넣어주는 정도”라고 말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시작한 2020년 2월 정부는 감염병 위기 경보를 ‘심각’ 단계로 높이면서 약 배송을 한시적이지만 전면 허용한 바 있다. 2023년 6월 위기 단계가 하향되면서 이 한시적 조치는 종료됐고 약 배송은 다시 전면 금지됐다.
이로 인해 휠체어에 의존해야 하는 중증 희귀질환 환자나 보호자는 매달, 혹은 격주로 의료용 쿨러백을 어깨에 둘러메고 병원을 방문해야 한다. 지방에 사는 환자나 보호자의 경우 짧은 진료와 한 달 치 약을 받기 위해 왕복 수백 km를 이동해야 하는 것이다. C 씨는 “주변 환자 보호자 중에는 1년 치 연차를 모두 병원을 방문하는 데 쓰는 사람도 있다”면서 고충을 토로했다.
지난해 11월 의료법이 개정되면서 올 연말부터 희귀질환자, 제1형 당뇨병 환자 등 제한된 범위에서 비대면진료와 약 배송이 허용된다. 희귀질환 환자와 보호자로서는 가뭄에 단비 같은 일상 회복의 기회를 마주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보건복지부령으로 정하도록 돼 있어 희귀질환 환자들이 효과를 체감하기 어려울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약사회에서 약 배송에 대해 오남용 및 안전성 문제가 있을 수 있다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어 보건복지부가 약 배송 가능 지역을 ‘동일 시·도 내 배송’ 혹은 ‘근거리 배송’으로 제한하는 것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서울 등 수도권에서 치료를 받는 지방 거주 희귀질환 환자로서는 기존과 별반 차이가 없다. 배송 중 변질 우려와 지역 약국 붕괴를 막겠다는 명분으로 제한하는 것이지만, 환자나 보호자가 직접 쿨러백에 약을 담아 몇 시간 동안 수백 km를 이동하는 것이 과연 안전할까. 결국 생명의 가치를 숫자로 환산하고 행정 편의주의에 갇힌 시스템이, 오늘도 희귀질환자들을 KTX 승강장으로 내몰고 있다.
최영찬 기자
chan111@bizhankook.com[핫클릭]
·
[극희귀질환 리포트] ② 약은 '그림의 떡'…경제성 잣대에 병 키우는 환자들
·
[극희귀질환 리포트] ① "성인이라는 이유로…" 저인산효소증 환자의 잔인한 현실
·
[K바이오에 AI더하기] 'AI 페르소나'로 마케팅 문법 바꾼다
·
[K바이오에 AI더하기] 로봇 연구원이 24시간 연구하는 'AI 실험실'
·
[K바이오에 AI더하기] 박영민 국가신약개발사업단장 "죽음의 계곡 넘도록 집중 지원"
·
[K바이오에 AI더하기] 정부는 GPU 지원, 협회는 신약개발 생태계 조성





















![[단독] 두나무, 서울거래와의 비상장 주식거래 특허 분쟁서 최종 승소](/images/common/side01.p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