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장소는 인간이 의미를 부여하는 공간이다. 장소감(場所感) sense of place)은 장소에서 순간적으로 느끼는 감정이나 감흥을 말한다. 장소 정신(spirit of place)는 좀 더 상대적으로 긴 시간에 형성되거나 빚어지는 의미나 가치 체계를 말한다. 장소성(Placeness)은 이런 장소감과 장소 정신이 사회적으로 확장, 공유될 때 확립된다. 개인적인 차원의 가치 부여만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서 집합적으로 형성된 의식에 기반을 둔다.
대개 인간이 체험을 통해 공간을 이해하고 그곳에 가치를 부여한다고 생각하는데, 스토리텔링을 통해 특정 공간에 의미를 다시 부여하기도 한다. 그러한 스토리텔링은 주로 공간에 얽힌 과거 사실을 바탕으로 재현된다. 이러한 스토리텔링의 방식 가운데 하나가 사극 콘텐츠다. 최근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특정 공간을 스토리텔링을 통해 매력적인 공간으로 만들었다.
강원도 영월의 청령포는 그동안 비극적 공간으로 인식됐다. 이른바 죽음과 슬픔의 공간을 둘러보는 ‘다크 투어리즘’의 공간에 가까웠다. 문치를 확립한 세종의 아들 문종은 요절했고, 문종의 아들 단종은 숙부 수양대군의 야욕에 12세에 왕좌에서 쫓겨나 유배 끝에 사사(賜死)됐다. 숙부가 조카를 잔혹하게 죽인 패륜 범죄의 현장임을 생각할 때 영월 청령포를 기분 좋게 방문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왕과 사는 남자’는 그러한 집단적 인식을 불식시켰다. 우선 단종을 수동적이고 미약한 존재로 규정한 것에서 벗어났다. 단종의 사체를 누구도 거두지 말라고 한 역사적 사실에 착안해 장항준 감독은 단종이 뭔가를 적극적으로 도모했을 것으로 추론했다. 그것은 세조에 대한 저항을 의미했다. 이는 합리적인 상상력이었다. 이 상상력의 결과, 영월 청령포는 피동적인 비극의 장소성이 아니라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장소성을 갖게 됐다.
엄흥도라는 인물이 이러한 장소성을 더욱 부각한다. 의로운 공간, 즉 옳은 일, 바람직한 일을 한 공간임을 보여준 것이다. 이는 역사적 기록에 바탕을 두었기에 설득력을 지닌다. ‘중종실록’을 보면 “엄흥도(嚴興道)란 사람이 찾아가 곡하고 관을 갖추어 (단종을) 장사 지냈다. 마음 사람들도 애상이 여긴다”라고 기록됐고,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는 물론 다른 기록에는 그가 “선한 일을 하다가 화를 당하더라도 달게 받겠다(爲善被禍 誠甘樂之)”라고 말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현종실록’은 “엄흥도의 절의를 사람들이 지금까지 일컫고 있습니다”라고도 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영화는 241년 만에 단종이 복권된 사실을 강조했다. 의로운 일을 행한 이들이 결국은 인정받고 올바르게 평가받는다는 역사 정신을 다시금 확인케 한다.
영화는 희극으로 전개되다가 예정된 비극을 넘어서 희망을 보게 만든다. 역사적 사실은 가볍고 유쾌한 영화의 전반부를 관통하며 여운을 짙게 남긴다. 비록 현실적인 무력감에 봉착한다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하게 해준다. 이것이 영월을 대하는 지금 우리가 느끼는 장소감과 장소 정신을 아우르는 장소성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을 영월을 방문하고 단종과 엄흥도를 떠올리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풀이된다.
많은 이가 영월을 방문한다는 소식은 다시 다른 사람들에게 영화를 보게 하는 동기가 된다. 도대체 영화가 어떻기에 실제 영월 청령포를 찾아간단 말인가. 또 장소에 관한 댓글 퍼레이드는 일정한 챌린지가 된다. 영화 ‘서울의 봄’ 상영 때는 심박수 챌린지라는 집단적 과제가 있었고, 영화 ‘파묘’ 때는 땅에서 나오는 ‘숭헌’ 것이 궁금해서 많은 사람들이 관람 행렬에 동참했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보여주는 것은 장소성과 그에 따른 방문 참여감이다. 역사적 연원과 기록이 있는 지역의 공간이기에 더 바람직하다. 콘텐츠는 그 자체의 소비로 끝나지 않으며, 참여와 체험을 통해 지역과 상생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K컬처는 장소성이 매우 부족하다. 지역만이 아니라 한국 전체로 넓혀봐도 그렇다. 한국을 찾아오게 만드는 스토리텔링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는 것은 이미 ‘케데헌’에서 보았다. 그런 의미에서 ‘왕과 사는 남자’를 더 주목해야 할 것이다.
필자 김헌식은 20대부터 문화 속에 세상을 좀 더 낫게 만드는 길이 있다는 기대감으로 특히 대중문화 현상의 숲을 거닐거나 헤쳐왔다. 인공지능과 양자 컴퓨터가 활약하는 21세기에도 여전히 같은 믿음으로 한길을 가고 있다.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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