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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의 소울푸드] 역사 응어리 풀어내는 박건웅 작가의 속풀이 칼국수​

'노근리 이야기' '홍이 이야기' '낙원' 등 아픈 역사를 만화로 '증언'

2026.06.26(Fri) 09:47:36

[비즈한국] 벽돌만 한 책을 꼬박꼬박 쌓아 올리고 있다. 박건웅 작가 이야기다. 2004년 ‘꽃’을 피운 작가는 스무여 해 만에 ‘낙원’을 그렸다. 음지로 내몰린 민중의 역사가 꽃이 되어 이룬 낙원이었다. 독립운동, 보도연맹, 빨치산, 노근리 학살, 제주 4·3, 인혁당, 고문 조작, 세월호 등 한국 근현대사의 그늘진 자리마다 벽돌 같은 책을 놓아 탑을 쌓았다. 마음이 가닿는 곳에 꽃이 폈다. 

 

“나 바빠요. 두 작품을 동시에 하고 있어.”

 

오월에 만나자고 청하니 돌아온 답이 숨을 헐떡인다. A3만 한 종이에 칸을 그리고 다시 그곳을 부지런히 채워 넣고 있을 그의 모습이 눈앞에 선했다. 마감 끝나고 보자는 어음을 받아 들고 생각하니 이 코너 콘셉트에 적격이다. 그렇게 한 달을 기다려 6월 중순, 부천의 한 칼국숫집에서 작가를 만났다.

 

박건웅 작가는 독립운동, 보도연맹, 빨치산, 노근리 학살, 제주 4·3, 인혁당, 고문 조작, 세월호 등 한국 근현대사의 그늘진 자리를 만화로 그렸다. 사진=필자 제공


#결혼식날도 먹은 바지락칼국수

 

홍대 근처에 있던 작업실을 부천으로 옮긴 2004년 무렵부터 여기 칼국숫집을 찾았다고 하니 벌써 이십 년 단골집이다. 칼국수를 그다지 즐기지 않던 작가가 이 집의 맛에 반한 뒤로는 한 달에 두어 번씩 꼭 찾게 되었단다. 부부가 둘 다 연애 시절부터 이 집을 좋아했는데, 오죽하면 결혼식날에도 식 마치자마자 화장도 안 지운 채로 이곳을 찾아 칼국수를 먹었다고 한다.

 

칼국수 나오기 전에 맛보기로 내주는 보리밥에 열무김치와 고추장을 넣고 슥슥 비비다 참기름을 한 바퀴 두른다. 고소한 냄새가 가시기 전에 한술 뜨고 나니 걸쭉한 들깨 수제비가 나온다. 작가가 국자를 들고 사람 좋게 웃으며 한 그릇 떠준다. 여럿이 왔을 때 한 국자씩 나눠 먹는 재미가 좋단다. 들깨의 농밀한 고소함이 인상적이다.

 

바지락을 수북이 담아 끓여낸 칼국수는 깔끔하고 담백한 맛이 일품. 이십여 년 동안 역사의 응어리를 풀어낸 작가가 단골로 삼을 만하다. 사진=필자 제공

 

바지락을 수북이 담아 끓여낸 칼국수는 작가의 말처럼 깔끔하고 담백한 맛이 일품이다. 옛날에는 바지락이 산더미처럼 쌓여 살 바르다 손에 쥐가 날 정도였다는데, 용포는 깃이 찢어져도 비단이라고 바지락 양이 줄었대도 으뜸이었다. 좌고우면하지 않는 우직한 국물에 속이 짜르르 풀린다. 이십여 년 동안 역사의 응어리를 풀어 씻어온 작가가 단골로 삼을 만하다. 작가와 가게 모두 스무 해 남짓 동안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제 자리를 지켜왔으니, 서로 닮았다고도 하겠다. 

 

#회화에서 만화로

 

박건웅 작가는 홍익대학교 미대 회화과를 졸업했다. 순수미술이 아닌 만화나 삽화를 낮춰보는 세상의 시각이 그에게도 있었다. 대학교 1학년 때 강경대 열사 사건을 겪으며 큰 충격을 받았다. 강경대 열사는 그와 동갑이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내면에서 영글기 시작했다. 병역을 마치고, 자신에게 맞는 발화 방식을 찾다가 아트 슈피겔만의 ‘쥐’를 만났다. 작가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아버지를 이해하기 위해 그린 작품은 전쟁의 참상이 인간을 어떻게 망가뜨리는지 입체적으로 드러낸다. 유대인 피해자의 서사를 넘어 인간 자체에 관한 이야기로 나아가는 이 걸작을 보고, 작가는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데뷔작 ‘꽃’이었다.

 

이때 만화의 표현형식이 막막한 그에게 스콧 맥클라우드의 ‘만화의 이해’가 큰 도움이 되었다고 했다. 칸과 칸 사이의 연속이 만화라는 설명에 그는 자신에게 친숙한 회화의 연속도 하나의 만화가 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래서 그는 말(대사) 없는 그림을 이어서 만화를 만들었다. 1980년대 민중미술의 목판화 같은 ‘꽃’의 첫 권이었다. 그는 이 시절의 깨달음을 잊지 않았다. 그는 나중에 경향신문 블로그 ‘칸과 칸 사이’에 만화를 연재하기도 했다.

 

#역사적 증언에서 만화적 증명으로

 

‘꽃’은 주인공 쟁초의 삶을 통해 일제 강점기부터 한국전쟁 전후를 조망하는 작품이다. “은폐와 망각의 저편 열 길 어둠 속에 묻힌 진실을 파낸 작품”이라는 신영복 선생의 서평처럼 박건웅 작가는 권력이 가리고 세상이 잊은 역사를 증언하였다.

 

비단 ‘꽃’뿐만이 아니다. 한국전쟁 당시의 학살을 기록한 ‘노근리 이야기’, 제주 4.3을 다룬 ‘홍이 이야기’, 비전향 장기수 허영철 선생의 삶을 그린 ‘어느 혁명가의 삶 1920-2010’, 민주주의자 김근태 전 국회의원이 남영동에서 당한 고문을 기록한 ‘짐승의 시간’, 인혁당 사형수 여덟 명의 이야기를 담은 ‘그해 봄’, 독립운동가를 소재로 한 ‘제시 이야기’, ‘옌안송’, ‘아리랑’까지, 작가는 자신이 스무 살의 봄을 잊지 않은 것처럼 불의한 망각 앞에 오롯이 맞서왔다. 증언이 그의 사명 같았다.

 

그러던 그가 변했다.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증언하기보다는 사실을 만화적으로 재구성해 진실의 함의를 증명하는 방식으로 나아갔다. 민간인 학살 이야기를 판타지로 풀어낸 ‘황금동 사람들’과 우주를 배경으로 기억과 망각, 시간성, 부모의 사랑과 같은 인간 본질적 주제를 다루며 세월호 사건을 암시하는 ‘낙원’이 그렇다. 

 

박건웅 작가는 역사적 사실을 만화적으로 재구성해 진실의 함의를 증명하는 방식으로 나아갔다. 사진=필자 제공

 

자신의 방향성을 설명하던 작가가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 이야기를 예로 들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장이었던 루돌프 회스의 기만적 평온을 묘사한 이 작품은 수용소 담장 너머에서 독일군 가족이 평온하다 못해 총천연색으로 행복하게 살고 있는 모습을 대비를 통해 표현함으로써 폭력을 직접 보여주지 않고도 보는 이로 하여금 폭력의 실체를 느낄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오래전 한 인터뷰에서 작가는 “만화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눈에 보이게 만드는 힘이 있다”라고 했는데 이제 그는 “보이지 않게 함으로써 더 잘 보이게 하는” 만화를 말하고 있다. 역사적 증언에서 만화적 증명으로 나아간 작가 인식의 깊이가 느껴졌다.

 

#일하는 사람의 손

 

“난 아직도 손에 먹물이 묻어 있지 않으면 불안해요.”

 

젓가락 잡은 그의 손을 가만히 보니 먹물이 새까맣게 손에 배어 있었다. 손 이야기를 꺼내자 겸연쩍어하던 작가가 자신은 며칠 작업을 못 해 손에 묻은 먹물이 빠지면 불안하다고 덧붙였다. 그 말을 들으니 프랑스 문부대신이 파브르의 손을 붙잡아 들어 올리며 했다는 말이 생각났다. “일하는 사람의 손은 절대 더럽지 않다. 이 손은 분명 일하는 손이다.” 스무 해 동안, 한 해에 한 권씩은 책을 낸 것 같다는 그의 우직함이 손에 까맣게 묻어 있었다. 거무튀튀한 그의 손이 밝게 빛났다.

 

스무여 권의 책을 내는 동안, 사절지(394×545mm)와 A3(420×594mm)를 오가며 그린 원화만 3만~4만 장이라고 한다. 언젠가 지금까지의 작업을 망라하는 대규모 원화 전시를 하고 나면 이제 다시 회화로 옮겨갈 생각이라는데, 그의 전시가 기대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가 그 자리를 계속 지켜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이제 체력이 예전 같지 않다는 그의 투정에 여든이 넘어서도 펜을 놓지 않는 조관제, 이두호 선생 이야기로 멍군을 불렀다. 창작의 지속성을 위해 밤새우지 않고, 직장인처럼 평일에만 작업한다는 규칙까지 만든 그가 만화를 떠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여전히 하고픈 이야기가 많은 작가의 다음 칸을 기대한다. 

 

박건웅 작가는 197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민중미술의 영향 아래에서 목판화 질감이 나는 독특한 화풍을 보여주며, 문학성을 지닌 강렬한 시각 매체이자 책의 물성을 바탕으로 둔 그래픽 노블 형식을 꾸준히 그리고 있다. 혹자는 박건웅 작가를 ‘작가주의 만화가’로 지칭하지만 박건웅 작가는 대중을 상대로 실로 끊임없이 시대적 화두를 이야기했다.

 

‘노근리 이야기’로 2011년 오늘의 우리만화상, ‘짐승의 시간’으로 2014년 제11회 부천만화대상 대상, ‘세월 1994-2014’로 2024년 대한민국 그림책상 특별상과 2025년 제30회 브라티슬라바 일러스트레이션 비엔날에 황금사과상을 받았다.

 

노무현·김대중 대통령 서거 때엔 광장에서 동료들과 대형 걸개 그림을 작업하며 민중 속에서 만화 예술이 보여줄 수 있는 행동을 했던 박건웅 작가는 최근에도 바쁜 일정을 쪼개 인스타그램 등에 만평을 올리며 현 시점의 사회적 이슈를 다루고 있다.

 

‘일어나요 강귀찬’ ‘수수께끼 소년 서동’의 김한조 작가와 공동으로 2009년 한국만화 100주년 기념전 ‘만화(漫畫), 만화(萬話) - 그 끝없는 이야기’ 전시를 기획한 바 있다.​

 

필자 서찬휘는 만화 칼럼니스트로 만화와 그 주변 문화들의 흐름과 연결고리를 역사적 맥락에서 탐색하고 정리해왔다. 1998년부터 만화 정보 커뮤니티 ‘만화인’을 운영했고 한겨레신문, 일요신문, 인천일보, 국방일보 등 여러 매체에 글을 썼다. 필자 송하원은 공공문화개발센터 유알아트 대표로 대안만화 전문서점 ‘홈통’을 운영하고 있다. 문화기획자이자 만화 연구자이며 성공회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겸임교수, 금천문화재단 이사 등을 맡고 있다. 두 사람은 ‘만화가의 소울푸드’에서 한국 대표 만화가들이 사랑하는 음식을 통해 작가의 삶과 작품세계를 함께 들여다보고자 한다. ​​

서찬휘 만화칼럼니스트

iam@seochanhwe.com

송하원 대안만화 전문서점 홈통 공동대표

solchan1986@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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