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대산 1호’ 프로젝트 승인을 계기로 국내 석유화학 산업의 본격적인 구조조정이 시작됐다. 정부와 업계는 이번 구조조정을 통해 공급과잉 문제를 해소하고, 고부가가치·친환경 산업으로 체질을 개선한다는 방침이다. 그러나 탄소중립을 위한 실질적인 산업 전환 대책이 미흡하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구조조정이 단순한 생산량 감축에 머물지 않고 진정한 ‘전환’으로 이어지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짚어본다.
석유화학의 탈탄소화는 이제 환경 캠페인의 언어로만 설명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여수·울산·대산 같은 산업도시의 일자리, 한국 수출 경쟁력, 기업의 생존이 모두 여기에 걸려 있다. 탄소를 줄이지 못하면 공장은 제품을 만들어도 팔 곳이 줄고, 수출길이 막히면 지역 경제도 흔들릴 수밖에 없다. 석유화학 탈탄소가 중요한 이유는 ‘지구를 지키자’는 당위에 앞서, 한국의 주력 산업이 앞으로도 살아남을 수 있느냐를 가르는 현실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세계 4위 석유화학 산업, 왜 한국 경제의 짐이 되었나
국내 석유화학 산업은 여수·울산·대산 3대 거점을 중심으로 성장했다. 중국·미국·사우디에 이어 세계 4위 생산능력을 갖춘 이 산업은 2023년 생산액 111조 원, 2024년 수출액 480억 달러(72조 원)를 기록한 한국 제조업의 핵심 축이다. 문제는 이 산업이 한국 경제를 떠받치는 동시에 온실가스도 대량 배출하는 대표 업종이라는 점이다. 국내 산업 부문 온실가스 배출량의 18.8%, 5360만 톤을 차지해 철강 다음으로 비중이 크다. 석유화학의 탈탄소 없이는 2035 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와 2050 탄소중립 달성도 사실상 어렵다.
하지만 더 시급한 이유는 따로 있다. 이제 탄소는 환경 문제가 아니라 무역 비용의 문제가 됐다. 유럽연합(EU)의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는 2026년부터 탄소 인증서 구매 의무를 본격 부과한다. 현재는 철강 등 6대 품목이 대상이지만, 앞으로 유기화학과 플라스틱까지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되면 탄소 배출이 많은 제품일수록 유럽 시장에서 더 비싸지고, 경쟁력은 더 떨어진다. 기업이 탄소 집약도를 낮추지 못하면 연간 수천억 원의 추가 비용을 떠안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미국에서도 청정경쟁법 논의가 다시 이어지면서, 탄소 배출량 관리는 이제 기업의 이미지가 아니라 재무 건전성과 수출 경쟁력을 가르는 기준이 되고 있다.
과거에는 좋은 제품을 싸게 잘 만들면 됐다. 이제는 얼마나 적은 탄소로 만들었는지도 가격표에 붙는다. 이 기준을 맞추지 못하면 한국 석유화학 기업은 해외 시장에서 밀리고, 공장 가동률이 떨어지며, 그 충격은 협력업체와 지역 상권, 고용시장으로 번진다. 석유화학 탈탄소가 지역경제와 직결된 문제인 이유다.
#두 가지 해법 “바이오 원료와 ECC”
이 같은 위기감 속에서 3월 17일 국회에서 ‘석유화학 지역위기 극복을 위한 탈탄소 전략 토론회’가 열렸다. 기후위기 탈탄소 경제포럼과 기후솔루션이 마련한 이날 토론회에서는 업계가 검토 중인 탈탄소 해법과 현실적 한계가 집중 논의됐다. 결론은 분명했다. 탄소를 줄여야 한다는 데 이견은 없지만, 현장에서는 기술 격차와 비용 부담, 원료 수급 불안이라는 세 개의 벽이 동시에 작동한다.
가장 먼저 거론되는 전략은 기존 화석 기반 원료인 나프타를 다른 원료로 일부 대체하는 것이다. 바이오 원료나 재활용 원료를 활용하는 방식은 기술 성숙도가 비교적 높고, 일부는 기존 설비를 그대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현실적인 대안으로 꼽힌다. 특히 바이오 나프타는 폐식용유 같은 원료를 활용해 생산할 수 있어 석유 의존도를 낮추는 수단으로 주목받는다. LG화학이 이탈리아 ENI와 협력해 충남 서산에 HVO 공장을 짓는 것도 이런 흐름의 연장선이다.
장용희 LG화학 저탄소추진팀장은 토론회에서 “기술 개발과 검증에 시간이 필요한 전기화 NCC(나프타 분해설비, Naphtha Cracking Center)를 기다리기보다 리사이클링 기술을 조기에 확산하는 것이 확실한 전략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궁극적 해법만 바라보기보다 지금 가능한 감축 수단을 먼저 넓혀야 한다는 뜻이다.
다만 바이오 원료도 한계는 분명하다. 가장 큰 문제는 안정적인 물량 확보다. 현재 국내 HVO 프로젝트와 탄소중립 정책은 바이오디젤이나 지속가능항공유 같은 수송용 대체연료 중심으로 짜여 있다. 바이오 나프타는 이 과정에서 나오는 부산물에 가까워, 석유화학 업계가 필요한 만큼 대규모로 공급받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폐식용유 같은 바이오매스 원료 역시 국내 수거 체계가 충분히 갖춰지지 않아 상당 부분을 해외에 의존해야 한다. 친환경 원료로 바꾸고 싶어도 원료 자체를 구하기 어려운 구조라는 얘기다.
장 팀장은 “국내 폐식용유(UCO) 수거 체계가 아직 잘 갖춰지지 않아 관련 정책을 요청 중”이라며 “UCO를 제외하고 2세대 오일 등 추가적인 원료를 찾아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기업 입장에서는 기술 개발보다 공급망 확보가 더 시급하다.
또 다른 대안으로는 북미산 에탄 도입을 통한 ECC(에탄 분해설비, Ethane Cracking Center) 전환이 거론된다. 에탄은 나프타보다 불순물이 적고, 탄소 배출을 최대 50%까지 줄일 수 있는 데다 원가 측면에서도 유리하다고 평가된다. 에틸렌 수율이 높아 생산단가를 낮출 수 있다는 점도 장점이다. 중국발 공급 과잉과 업황 부진에 시달리는 업계로선 탄소와 원가를 동시에 낮출 수 있는 카드다.
그러나 이 역시 만능 해법은 아니다. ECC는 에틸렌 생산에는 효율적이지만 제품군이 단순해진다는 한계가 있다. 석유화학 산업은 다양한 기초유분과 파생 제품을 함께 뽑아내는 구조인데, 에탄 중심 체제로 가면 생산 포트폴리오가 좁아질 수 있다. 여기에 에탄의 가격 우위는 미국 셰일가스 정책과 국제 정세에 크게 좌우된다. 지금은 유리해 보여도 지정학적 변수나 자원 무기화, 미국 에너지 정책 변화에 따라 상황이 언제든 바뀔 수 있다.
김동하 HD현대케미칼 팀장은 “호르무즈 사태를 보면 원료 다변화가 생존에 필수인데, 에탄은 보조 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라며 “프로판을 활용한 PDH 공정으로 고부가가치 제품에 필요한 프로필렌을 생산해 다양한 제품군을 보완할 수 있다”고 말했다. 결국 한 가지 정답을 찾기보다 원료를 다변화해 리스크를 분산하는 전략이 더 현실적이라는 뜻이다.
#정부 과감한 지원 필요
석유화학 탈탄소의 더 근본적인 해법으로는 NCC 공정 자체의 전기화와 수소·암모니아 연료 전환이 꼽힌다. 다만 이 영역은 아직 시간도, 돈도 많이 드는 단계다. 업계가 전기화 NCC를 최종 목표로 보더라도, 수익성이 떨어진 기업들이 막대한 실증 비용을 감당하기는 쉽지 않다. 기술적으로도 검증해야 할 과제가 많다. 지금 석유화학 업계의 현실은 분명하다. 탄소는 줄여야 하지만 돈은 부족하고, 미래 기술은 필요하지만 당장 현장에 적용하기엔 시간이 모자란다.
그래서 토론회에서는 정부 지원의 필요성이 거듭 강조됐다. 석유화학 탈탄소는 개별 기업이 설비 몇 개 바꾸는 수준으로 해결될 수 없고, 전력·수소·원료 공급망·재활용 체계 같은 국가 인프라와 함께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다. 박진수 플랜잇 대표는 독일의 탄소차액계약제도(CCfD)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짚었다. 이는 기업이 저탄소 공정으로 전환할 때 발생하는 추가 비용과 실제 탄소 가격의 차이를 정부가 일정 기간 보전해주는 방식으로, 기업으로선 대규모 투자를 결정할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전판이 된다.
이 같은 제도가 필요한 이유는 국내 탄소 가격이 아직 감축 투자를 과감히 유도할 만큼 높지 않기 때문이다. 기업들도 탄소 감축이 장기적으로 필요하다는 점은 안다. 하지만 지금 손익계산서를 기준으로 보면 수천억 원을 먼저 투입할 유인이 부족하다. 결국 정부가 제도를 통해 초기 리스크를 줄여주지 않으면 산업 전체의 전환 속도는 늦어질 수밖에 없다.
정부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3월 4일 산업통상자원부는 ‘화학산업 혁신 얼라이언스’를 출범시켰다. 공급자 중심의 연구개발에서 벗어나 실제 소재를 쓰는 수요 기업까지 참여해 시장 수요를 반영한 기술 개발을 추진하겠다는 취지다. 토론회에 참석한 노귀석 산업통상자원부 화학산업과 사무관은 “현재 석화 기업은 투자 여력이 없어 정부가 앞장서 고부가 전환 R&D 로드맵을 제시해 마중물 역할을 해야 한다”며 “LG화학 전남 여수공장에서 NCC 수소·암모니아 연료 대체 실증 사업이 2028년까지 예정됐고, 전기 NCC도 2023년에 시작해 2030년까지 실증 사업을 추진 중”이라고 설명했다.
석유화학 탈탄소는 기술보다 순서와 속도가 핵심이다. 전문가들은 당장 할 수 있는 재활용·바이오 원료 사용은 빠르게 확대하고, 중장기적으로는 전기 NCC와 연료 전환 같은 대형 기술을 실증해가며, 그 사이 정부가 제도와 자금으로 투자 위험을 덜어주는 구조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어느 하나만으로는 부족하다.
김민호 기자
goldmino@bizhankook.com[핫클릭]
·
보스턴다이내믹스 몸값 30조 근접…현대차그룹, 자동차 넘어 피지컬 AI로
·
포스코퓨처엠, 인조흑연 음극재 '1조 수주' 주목하는 이유
·
[배터리, 로봇의 심장이 되다]① [현장] 인터배터리 2026, 전기차 지고 '로봇'이 뜬다
·
[석유화학 대전환] ① 대산 1호엔 감산만 있고 '기후'가 없다
·
여천NCC·쿠웨이트 국영석유공사 선언한 '불가항력' 조항은 무엇?
·
[단독] '전력망 알박기 무려 7GW'…정부, 허수사업자에 칼 빼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