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서울 동대문구 경동노인요양원 인근 골목. 콜라텍과 전통시장이 나란히 들어선 이 거리는 오가는 보행자 대부분이 노인이다. 노인보호구역임을 알리는 실버존 표지판이 있지만 속도를 늦추는 구조물도, 단속 카메라도 보이지 않는다. 경로당 앞을 지나던 70대 남성에게 이곳이 노인보호구역인지 묻자 그는 되물었다. “여기가 노인보호구역이었느냐.” 보호받아야 할 당사자조차 모르는 구역. 이곳에서는 2022년부터 2024년까지 3년 연속 사고가 반복됐다.
실버존이 사실상 방치되고 있다. 서울시 13개 구의 무인교통단속카메라 현황과 노인보호구역 지정 현황을 교차 검증한 결과, 13개 구의 실버존 90곳 중 교통단속 카메라가 설치된 곳은 21곳에 불과했다. 7개 구는 설치율이 0%였다. 어린이 보호구역(스쿨존) 238곳에 카메라가 설치된 것과 대조적이다. 한국도로교통공단 자료에 따르면 서울 시내 실버존의 교통사고 발생 건수는 2022년 202건, 2023년 210건, 2024년 196건을 기록했다. 2007년 도입 이후 실버존이 꾸준히 늘어났지만 사고 발생 건수는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실버존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시민도 많았다. 앞서 경동노인요양원 인근에 거주하는 20대 A 씨는 “집과 학교 근처에 실버존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몰랐다”고 말했다. 정작 보호 대상인 노인도, 주변을 오가는 젊은 주민도 노인보호구역을 모르는 것이다.
지자체의 대응은 제한적이었다. 동대문구 교통행정과 관계자는 “해당 구간은 사고가 가장 많은 곳이지만, 보행자의 교통법규 위반으로 인한 사고 비중이 높다”며 “CCTV는 운용 중이나 교통단속용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실버존과 관련해 사고 예방 활동이 별도로 있느냐는 질문에는 “보호구역 지정과 시설 유지보수 외에 특별한 활동은 없다”고 답했다.
은평구청 어르신복지과 관계자 역시 실버존의 사고 예방 활동 여부를 묻는 질문에 별도 활동이 없다고 밝혔다. 강동구청 교통개선팀 관계자는 “실버존은 기준이 되는 시설이 도로가 좁은 주택가에 주로 있어 관리가 어렵고, 단속 장비 설치나 주정차 단속도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며 “운전자 주의를 유도하는 표지판 설치 위주로 운영하고 있다”고 밝혔다.
예산 구조도 문제다. 도로교통법 시행규칙에 따르면 무인교통단속카메라는 법규 위반이 빈번하거나 교통사고가 잦은 곳에 설치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설치 예산을 지자체가 전액 부담해야 하는 탓에, 민원이 집중되는 스쿨존 위주로 설치되는 것이 현실이다.
제도적 공백도 맞물려 있다. ‘어린이·노인 및 장애인 보호구역의 지정 및 관리에 관한 규칙’에 따르면, 보호구역 지정 이후 의무 사항은 신호등 설치와 유지보수 등에 한정되어 있다. 사고 다발 구간이라 하더라도 추가적인 안전시설 설치나 단속을 강제하는 규정은 없다. 지정만 있고 예방은 없는 구조가 실버존을 사실상 유명무실하게 만들고 있는 셈이다.
전문가들은 제도의 근본적인 재설계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이수범 서울시립대학교 교통공학과 교수는 “노인은 어린이처럼 한 시설에 집중적으로 모이지 않아 실버존의 실효성이 떨어진다”며 “보호구역 지정에서 끝낼 것이 아니라, 노인의 행동 특성을 분석해 맞춤형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홍정열 계명대학교 교통공학과 교수는 “한국은 이미 초고령사회에 진입했고, 고령 인구 증가 속도도 빠르다”며 “표지판만으로는 체감 효과가 제한적이다. 속도 관리, 노면 표시, 조명 개선, 경찰 단속, 보행환경 정비까지 함께 이뤄져야 고령자의 안전을 실질적으로 보장하는 도로 구조를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노인 교통사고는 최근 꾸준한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서울도로교통공단 교통사고분석시스템에 따르면, 서울 시내 노인 교통사고는 2021년 4829건에서 2024년 5926건으로 1000건 이상 늘었다. 전국 수치도 마찬가지다. 2021년 3만 4907건이던 노인 교통사고는 2024년 4만 208건으로 증가했다. 실버존이 도입 취지에 맞는 실효성을 갖추려면, 단순 지정을 넘어 관리 기준과 책임 규정을 갖춘 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김상훈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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