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1920년대 할리우드에서는 신인 감독들을 발굴해 적은 예산으로 실험적인 작품의 연출을 맡겼다. 1930년대 대공황기에 경제적 어려움으로 관객들이 극장을 많이 찾지 않자 극장주들은 이런 저예산 실험 영화들을 적극 극장에 개봉하기 시작했다. 영화 2편을 동시에 상영하는 방식이었다. 더블 빌 전략 혹은 더블 피처 전략에 따랐다. 이는 두 편 동시 개봉 혹은 티켓 한 장으로 영화 두 편을 볼 수 있게 한 마케팅 전략이었다. 예전에 카세트테이프를 구매하면 A면과 B면을 들을 수 있는 것과 같았다.
이런 영화를 한국에서는 ‘B급 영화’라고 불렀지만 사실 B급 영화는 없다. A무비와 B무비가 있을 뿐이다. 제작비가 저렴한 영화를 한국에서 B급 영화라고 번역했을 뿐이다. B무비(movie)라는 용어는 영화 ‘레이디스 크레이브 익사이트먼트(Ladies Crave Excitement, 1935)’에서 처음 사용했다고 한다.
두 편 모두 제작비를 대규모로 들일 수 없었기에 한 편은 소규모 제작비와 인력으로 단기간에 만들었다. 따라서 실험적이면서도 다양한 장르가 시도됐다. 완성도는 떨어질 수 있지만 파격적인 연출도 가능했다. 기존 상업 영화에서 볼 수 없는 독립영화나 장르적인 특징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영화들은 주류 상업 영화들의 흥행 코드와는 달랐지만 독특한 콘셉트와 스타일, 연출로 신선한 자극을 주고 마니아층을 형성했다.
영화계는 B무비를 통해 A무비의 한계를 극복하고 진일보할 수 있는 수원지를 얻고는 했다. 이런 점 때문에 B급 영화들을 우월시하는 경향도 생겨났다. 어차피 나중에 대가가 되는 신인 감독들은 이런 B무비에서 나왔기 때문에 일치감치 주목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다만 B급 영화에 절대적인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며, B급 스타일과 정체성도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예전의 B무비 역할을 하는 것이 요즘은 SNS다. 결정적으로 유튜브는 어느새 할리우드 영화의 수원지 역할을 하게 됐다. 단순히 SNS에서 입소문이 나 극장 관객이 늘어나는 것을 넘어서 이제는 영화 제작 단계부터 직접적으로 개입한다.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영화 ‘백룸(Backrooms)’이다. 이 영화는 ‘미나리’ 등을 제작한 미 독립영화 제작·배급사 A24의 작품이다. A24는 3년 전 케인 파슨스를 감독으로 발탁했다. 그의 나이는 불과 20세다. 더구나 그는 유튜버였다.
A24는 왜 어린 유튜버를 감독으로 기용했을까? 물론 그가 영화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케인 파슨스는 2022년 9분짜리 페이크 다큐멘터리 ‘백룸’을 만들어 유튜브를 통해 전 세계에 회자시킨다. 백룸은 무대 뒤 대기실을 가리키는데, 사실 이 소재는 오랫동안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은 콘텐츠에서 비롯했다. 그 콘텐츠는 사진 한 장이다.
2019년 5월 14일 온라인 커뮤니티 포찬(4chan)의 미스터리 게시판 /x/에 사진 한 장이 올라왔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공간인데 노란 벽지의 방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내부는 축축하다. 이 사진은 곧 ‘도시 전설’이 된다.
도시 전설 서사는 노클립과 결합해 공포 현상을 일으켰다. 노클립 현상(Noclip)은 본래 주로 게임에서 사용하던 용어로, 일반적인 게임 플레이 규칙을 넘어 게임 오브제를 통과하거나 제한된 공간을 자유롭게 이동하는 것을 말한다. 즉 플레이어가 장벽이나 장애물을 자유롭게 통과하는 설정이다. 이제는 차원이나 현실을 뛰어넘어 들어가 그 안에 갇히는 현상을 가리킨다. 사람들은 친숙한 공간이 낯설게 느껴질 때 더 공포감을 느낀다. 사람들이 있어야 하는데 하나도 없고, 밝은 노란색 공간인데 음습하고 웅웅거리는 형광등 소리만 난다면 뭔가 무서운 일이 일어날 듯싶다. 이것이 콘텐츠로 확산 증폭됐다. ‘백룸’은 개봉 첫 주에 다른 대형 상업영화를 물리치고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고, 140억 원의 제작비를 들여 1주일 만에 매출 14배를 올렸다.
유튜버 출신 감독은 여럿 있다. 구독자 3800만 명의 유튜버 마키플라이어(Markiplier)는 2026년 1월 인디 호러 게임 ‘아이언(Iron Lung)’을 원작으로 한 동명의 영화를 감독, 연출하고 주연까지 했다. 그는 단돈 800달러로 제작해 2024년 유튜브에 무료 공개한 공포 단편 ‘밀크 그리고 시리얼(Milk & Serial)’로 주목받아 ‘아이언’의 연출을 맡게 됐다.
1999년생 26세 유튜버 커리 바커가 연출한 공포영화 ‘옵세션‘은 제작비 75만 달러의 초저예산 작품인데 개봉 첫 주말에만 1600만 달러의 매출을 올렸다. 종국에는 3000억 원 이상의 수익을 기록했다. 이런 흥행 덕분에 공포 명작 영화로 꼽히는 ‘텍사스 전기톱 살인사건’의 리부트 연출 및 각본을 맡았다.
데이비드 F. 샌드버그(David F. Sandberg)는 유튜브에 짧은 공포 단편을 계속 업로드했다가 ‘라이트 아웃’이 눈에 띄어 같은 이름의 영화는 물론 ‘애나벨: 인형의 주인’, ‘샤잠!’을 연출하게 된다. 구독자 약 700만 명의 액션·코미디 유튜브 채널 필리푸 형제(대니 & 마이클 필리푸)는 장편 영화 ‘톡 투 미(Talk to Me, 2023)’를 감독한 바 있다.
유튜브 출신들은 크게 두 가지 유형이다. 하나는 사회관계망서비스에 공유되는 아이템을 사용하거나 그곳을 작품의 노출 플랫폼으로 삼는다. 아울러 이들은 공포물 등 장르적이면서 마니아층이 있는 작품을 만든다. B급 영화 혹은 B무비들이 보인 특징과 같다. 앞으로 눈 서비스를 통해 영화감독과 소재나 스토리가 발굴될 가능성이 큰데, 한국에서도 이 같은 일들은 시간문제일 것으로 보인다.
B급 영화이든 B무비든 새로운 실험과 시도가 사회관계망서비스에서 비롯되는 것은 기성세대에게는 낯설지만 새로운 세대에게는 당연한 것이다. 미래세대에게는 진리처럼 받아들여지는 날도 머지않은 듯싶다. 이를 위해 대비와 적응이 필요한 시점이다. 다만 특정 장르에만 치우치지 말고 다양한 실험과 시도가 더 필요해 보인다. 어쨌든 극장에 갈 이유를 만들어주는 계기는 언제나 필요한 미디어 상황이다.
필자 김헌식은 20대부터 문화 속에 세상을 좀 더 낫게 만드는 길이 있다는 기대감으로 특히 대중문화 현상의 숲을 거닐거나 헤쳐왔다. 인공지능과 양자 컴퓨터가 활약하는 21세기에도 여전히 같은 믿음으로 한길을 가고 있다.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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