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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제의 시대, '근본이즘'에 젊은 세대 열광하는 까닭

박물관·노포·고전문학 등 검증된 원형에 더 큰 가치…복제 쉬워질수록 원본 가치 뚜렷

2026.04.03(Fri) 15:39:37

[비즈한국] AI와 디지털 복제품이 넘쳐나는 시대, MZ세대를 중심으로 ‘근본이즘’이 하나의 트렌드로 떠오르고 있다. 복제와 가공이 쉬워질수록 젊은 세대는 대체 가능한 콘텐츠보다 오래 축적된 시간, 검증된 원형,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실재에 더 큰 가치를 두는 모습이다. 빠르게 변하는 유행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기준과 정통성을 찾으려는 욕구가 소비와 문화 전반으로 번지고 있다.

 

지난 2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은 평일 낮 시간임에도 관람객들로 붐볐다. 전시관 곳곳에서 방문객들은 발걸음을 늦추고 유물을 하나씩 살폈다. 출입구와 전시관 옆 기념품점도 북적였다. 전통 유물을 모티브로 한 ‘뮷즈’를 사려는 관람객들이 진열대 앞에 모였고, 일부는 직원에게 인기 상품을 묻거나 상품을 비교했다. 이날 박물관에는 다양한 연령대가 찾았지만, 특히 20~30대 방문객 비중이 두드러졌다.

 

복제와 변형이 쉬워진 시대, 젊은 관람객들은 유물 앞에 멈춰 서 원형을 확인한다. 디지털로는 대체할 수 없는 ‘실물의 시간’이 새로운 소비가 되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뮷즈샵. 사진=정원혁 인턴기자

 

국립중앙박물관은 2025년 연간 관람객 약 650만 명을 기록하며 개관 이후 최다 관람객 수를 새로 썼다. 전년보다 약 1.7배 늘어난 수치다. 디지털 이미지와 영상으로도 유물을 쉽게 접할 수 있는 시대지만, 실물을 직접 보고 그 경험 자체를 소비하려는 흐름이 강해진 셈이다.

 

주목할 것은 이들이 유물 앞에서 멈추는 동시에 뮷즈 앞에서도 멈춘다는 사실이다. 원형을 확인하고, 곧바로 그것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상품을 산다. 언뜻 모순처럼 보이지만 이 두 행동은 하나의 심리에서 나온다. 이들에게 ‘근본’은 박제된 과거가 아니라 새로운 변형의 출발점이다. 원형을 직접 눈으로 확인한 뒤에야 비로소 변형된 것의 의미도 온전히 소비할 수 있다는 감각이다. AI가 어떤 이미지든 순식간에 만들어내는 시대에, 변형의 근거가 되는 실물을 확인하는 행위 자체가 하나의 가치가 된 것이다.

 

서울의 대표적 노포 다방인 학림다방에도 비슷한 분위기가 감지된다. 1956년 문을 연 이곳은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다방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이날 오후 2시께 찾은 매장 안은 오래된 목재 인테리어와 벽면을 채운 LP판이 어우러져 시간의 흔적을 고스란히 품고 있었다. 매장 안 손님은 20~30대가 대부분이었고, 입장을 기다리는 대기 손님도 눈에 띄었다.

 

70년의 시간을 버텨온 공간 앞에 2030세대가 줄을 선다. 복제할 수 없는 물리적 시간이, 디지털 시대의 가장 강력한 경험이 되고 있다. 학림다방 내부 모습. 사진=정원혁 인턴기자

 

노포를 찾는 행동을 복고 취향으로만 읽는 것은 피상적이다. 이들이 학림다방에서 소비하는 것은 커피나 파르페가 아니라 시간 그 자체다. AI가 어떤 공간이든 이미지로 재현할 수 있는 시대에, 디지털로 복제할 수 없는 유일한 것은 그 장소가 실제로 버텨온 70년이라는 물리적 시간이다. 오래된 목재의 질감, LP판에 남은 손때, 수십 년간 쌓인 공간의 냄새는 아무리 정교한 재현도 흉내 낼 수 없다. 젊은 세대가 그 공간에 기꺼이 줄을 서는 것은 재현 불가능한 것에 대한 감각이 예민해졌다는 방증이다. 역설적이게도, 복제 기술이 정교해질수록 복제되지 않은 것의 가치는 더 선명해진다.

 

‘근본’을 찾는 흐름은 출판업계에서도 이어진다. 인터넷 서점 예스24에 따르면 2024년 1~9월 세계문학 시리즈 판매량은 전년 동기보다 5.8% 증가했다. 특히 20대 구매 비율은 2019년 7.5%에서 2024년 14.3%로 크게 늘었다. 온라인 독서 플랫폼 밀리의서재의 ‘독서 트렌드 리포트 2025’에서도 고전 문학을 가장 많이 읽은 연령대는 20~30대로 나타났다. 실제 교보문고 광화문점 해외 소설 판매 상위권에는 ‘싯다르타’,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인간 실격’ 등 고전 문학 작품이 다수 올라 있었다.

 

최근 서점가에서 고전 문학이 다시 주목받고 있는 점도 흥미로운 대목이다. 교보문고 광화문점. 사진=정원혁 인턴기자

 

고전 문학의 부상은 정보 과잉과 무관하지 않다. 알고리즘이 취향을 분석해 콘텐츠를 끝없이 추천하는 환경에서, 무엇을 읽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감각은 역설적으로 강해진다. 선택지가 많아질수록 선택의 불안도 커지기 때문이다. 이때 고전은 알고리즘의 추천과 다른 종류의 신뢰를 제공한다. 수십 년, 수백 년을 살아남았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의 검증이다. 플랫폼이 바뀌고 유행이 지나도 살아남은 텍스트는 ‘읽을 가치가 있다’는 확신을 알고리즘보다 더 강하게 준다. 콘텐츠 선택의 피로가 커질수록 시간이 검증한 기준에 기대려는 심리는 자연스럽다.

 

이처럼 복제가 쉬워질수록 오히려 원본의 가치가 선명해지는 역설이 나타나고 있다. 박물관의 유물, 노포의 시간, 고전의 문장을 향한 젊은 세대의 관심은 단순한 복고 취향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이들이 원형에서 찾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형되는 현재를 판단하는 기준이다. 근본이즘이 일시적 유행인지 아니면 디지털 시대의 구조적 감각인지는 아직 단정하기 어렵다. 다만 복제와 변형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원형에 대한 질문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지금의 흐름이 보여주고 있다.​​

 

이런 흐름은 과거의 복고 유행과 결이 다르다. 복고가 특정 시대를 그리워하는 향수를 동력으로 삼는다면, 근본이즘의 동력은 불확실성에 대한 반응에 가깝다. 무엇이든 생성되고 변형될 수 있는 시대에, 변형 이전의 상태를 직접 확인하고 싶다는 욕구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우리는 모든 게 쉽게 변형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다 보니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둥둥 떠다니는 듯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며 “그럴수록 변형을 하더라도 근본이 무엇인지 파악하려는 심리가 커진다”고 설명했다.

정원혁 인턴기자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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